"존, 우리 마음에 그림자병이 찾아 들게 해서는 안돼요. 부서져 버린 이 우주 안에서 우리는 늘 분하고 비통할 수 밖에 없죠. 하지만 분노와 슬픔에 빠져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쁨을 놓쳐서는 안돼요. 이 모든걸 느낀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존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소녀가 이브의 아이라면, 피와 물 속에서 이루어진 그야말로 슬프고 비참한 탄생이 아닌가, 이런 죄악 속에서 어떻게 선함이 가능하겠는가.
네가 증인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내가 약속할게
그래, 릴리. 부끄러워 하지마. 우리의 깊은 기대감은 그것만으로도 생명력이 있으며 우리가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다는걸 일깨워주지. 또 그런 바람은 희망을 자극하고.
생명이란 마주보는 곳에 있으며 죽음은 돌아서는 데 있다.
"길은 예측할 수 없어요. 안전하다는 의미는 어떤 길을 가느냐가 아니라 어떤 교제를 하느냐에 대한 것 아닐까요?"
"릴리, 신뢰는 물건이 아니다. 그건 바로 약하고 벌거벗은 네가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면서도 전혀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너에게는 신뢰가 오를 수 없는 산이라고 말해준 과거와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너는 할 수 있단다."
"정말 제가 그 산을 오를 수 있을까요?"
"그래. 너는 이미 한 번에 한 걸음씩 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결코 혼자 오른 적이 없지."
"아가,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아. 신뢰란 일생에 단 한번 내리는 선택이 아니고, 매 순간 강물이 흐르듯 선택하는 거야. 우리를 둘러싼 선물에 감사하고, 또 그 선물을 보내고, 혹여 한번 잃더라도 어느 것도 잊히지 않았다는 걸 신뢰하는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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