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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무리]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 박영식 |
낙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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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깊은 절망의 심연에 빠져든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이때 내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상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이 내 고통을 제거해주지 않거니와 그 고통의 원인을 다 해명하지도 못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가운데서 단순히 고통의 병리학적 원인이 아니라 고통이 던져주는 삶의 의미를 묻게된다. "하나님, 왜 내게서 사랑하는 그 사람을 빼앗아가셨습니까? 왜 나에게 이런 끔찍한 고통을 주십니까?" 여기서 '왜' 라는 물음은 아픔의 물리적 원인이 아니라 삶의 존재론적 의미와 근거를 따지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이 제기하는 질문은 근본적으로 존재의 의미와 근거가 되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다. "참혹한 고통의 심연속에서도 그분은 여전히 내 삶의 의미와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앞에서 간략하게 서술했던 고통의 원인에 대한 전통적인 신학적 답변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변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전통적인 답변들은 고통의 원인 - 거기에 숨겨진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원인- 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확고히 함으로써, 하나님이 여전히 내 삶의 의미와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답변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냉철한 변론만 들었을 뿐이지, 정작 고통당해 울부짖는 우리 자신을 향한 그분의 사랑이나 우리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변호는 듣지 못할 때가 많다. 더군다나 전통적인 답변들이 제공하는 고통에 관한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이유들이 더 이상 설득력이 없어 보일 때, 그래서 전통적으로 해명된 하나님에 대한 변론으로는 더 이상 하나님을 내 존재의 근거와 의미로 신뢰할 수 없을 깨,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내 존재의 근거와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고전적인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고전적인 방식은 하나님을 모든 사건의 제 1원인(prima causa)으로 규정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 원인들의 최종적 근거가 되는 원인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는 어떤 원인에 의해 생겨났는가? 고전 유신론은 하나님은 제 1원인이시기에 그분 자신은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시며, 자기밖에 그 무엇을 원인으로 두시지도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기원인(causa sui) 이라고 말했다. 익숙한 말로 바꾸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 이다.
이처럼 고전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을 '원인'(causa)으로 생각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그래서 고통의 원인도 결국 하나님께로 소급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말로 모든 것의 원인이신 하나님이 또한 악과 고난의 원인이신가? 앞서 보았듯이 전통적인 신학적 답변들은 여기서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과율적으로 원인을 묻는 전통적인 사유방식은 무의미한 고통에 직면하여 더 이상 유효성을 인정받이 어렵다. 설사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하나님을 제1원인으로 상정하여 그 고통의 이유를 해명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우리는 그런 존재를 여전히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무의미한 고통을 던져주는 그 존재를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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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고통의 궁극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용감하게 시인해보자. 이와 함께 고통의 원인을 역추적하는 인과율적인 신학적 사유에서 벗어나 보자. 또한 하나님을 제1원인으로 사유하는 방식과도 결별해보자. 적어도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다면, 이제 고통의 원인을 형이상학적으로 캐묻고, 잘 짜인 형이상학적 체계 속에서 고통의 원인과 의미를 연역해오던 전통적인 시도들에서 과감히 탈출해보다. 더 이상 허세를 떨지 말고 정직하고 용감하게, 무의미한 고통의 이유와 의미를 모른다고 말해보자. 하나님을 모든 일의 원인이 되는 저 과거의 출발점에 세워두는 일을 포기한다면, 이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나님의 시간은 죽어버린 과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재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닐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인정해도, 지금 내게 닥친 고통의 원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고통의 의미와 이유를 모른다고 해도 신앙과 삶을 포기하고 무너질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죽어버린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하신다. 비록 고통의 의미를 다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지독한 고통의 심연에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이 세상과 상관없이 저 하늘 위에서 홀로 고고하게 구름을 타고 노니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밌는 생각이지만 실은 어린 시절의 유치한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적어도 성서가 그려주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그렇지 않다. 성서의 하나님은 고통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고통받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만난 하나님이 그렇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출 3:7,9)
떨기나무의 불꽃은 하나님의 임재뿐 아니라 이집트에서 학대당하는 히브리인들의 고통을 상징한다. 즉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의 고통, 자기 백성의 고통, 바로 그 안에 계신다.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자리는 다름 아닌 고통의 현장이다. 그렇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통당하는 현실 안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신다는 생각은 오늘날 현대신학에서 결코 낯선 개념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제 1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고전 유신론의 생각을 과감히 버린다면, 이제 하나님은 제1원인으로서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지 않으시며, 그 안에서 모든 사물의 인과관계를 미리 결정해놓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지금 여기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고통을 듣고 보고 아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제 우리는 '도대체 왜?' 라는 질문에서 '지금 어디에?' 라는 질문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내가 고통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셨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 성서는 분명하게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바로 거기 함께 계셨다고 대답한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을 때에도, 하갈이 버림받아 울고 있을 때에도,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고통당하고 있을 때에도, 다니엘과 세 친구가 불구덩이에 던져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바로 거기 고통 당하는 자의 곁에서 함께 계셨다. 이것이 성서의 대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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