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p) 부모가 이혼하면서 대학생 때부터 혼자 살아온 민에게는 그렇듯 무조건 주려는 유형의 사람이 처음이었다. 민은 종우의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온 밤이면 그런 상상을 했었다. 십 수년 뒤, 자신과 종우의 아이가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하고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는 날에 밤기차를 타고 그녀를 찾아가는 상상. 그녀는 연락도 없이 찾아온 아이에게 가장 좋고 가장 깨끗한 것만을 골라 먹일 것이다. 나쁜 냄새가 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쓸고 닦을 것이며 밤에는 아껴둔 새 이불을 펼칠 것이다. 그녀와 단 둘이 며칠을 보내면서 아이는 추상적인 고통이 아니라 구체적인 감각으로 채워지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건 곧 위로이기도 하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될 터였다.
69p)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고독한 두 은둔자가 불완전한 언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민은 문턱에 서서 한참동안 지켜봤다.
83p) 그녀가 사라지면 매번 갈 곳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수는 새삼스러웠다.
111p) 어쩌면 그들의 슬픔과 자신의 슬픔이 교환되고 공유되어 결국 같은 무게로 남게 되는 상황을 견딜 수 없다는 게 가장 솔직한 심정인지도 몰랐다.
119p)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쇠락한 놀이공원이나 버려진 슈트케이스를 보면 틀림없이 그녀를 떠올리게 되겠지만 그런 순간이란 소멸하기 위해 존재하는 신기루 같은 것임을 수도 잘 알고 있었다.
143p) 그리고 그 외로움 마저 습관이 되어 피로나 추위와 구분되지 않는 날도 올 것이다.
147p) 민은 그를 깨우려다가 그만두었다. 차라리 꿈속의 슬픔이 현실을 넘보지 못하도록 그 안에서 완전히 소진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155p) 의견서와 각서에 관한 소문이 돌고 종우의 서류들과 컴퓨터가 회수될 때, 민은 종우가 그어놓은 선 밖에 있었다. 선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지 않는 얼굴로 그의 침몰을 구경했다. 그를 외면했으며 동시에 그에게서 버려졌다. 부끄러웠다. 돌이켜보니,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다. 종우가, 그의 무모한 선택이, 무리에서 배제된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지던 순간. 아니, 부끄러운 건 그가 아니라 민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가 없어서,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으므로 부끄러움 뒤에 숨어 있었던 것이리라. 부끄러움의 뒤편은 외로웠으나, 대신 안전했다.
200p) 그러나 기다림의 시간과 평행을 이루며 증폭되어가는 버려진 자들의 궁핍과 박탈감은 게임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패배감을 안길 터였다. 승패가 결정 될 떄까지 패배의 몫을 미리 지불해야 하는 이상한 게임, 그 한가운데 종우도 서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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